잔해

[3]

2019. 5. 9. 12:15

 이상하게 바쁜 날이면 더 잠이 오지 않아서, 저녁 수업을 들을 때가 되면 하품을 연발하게 된다. 오늘도 그런 날이였다. 미루고 미루던 숙제를 새벽 두시가 되어서야 끝마치고 침대에 누워 영상 몇개를 보고 네시가 되어서야 잠들었다.

정말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여유가 없다.


며칠 전 수업 중에, 바닥까지 파고들던 생각이 방향을 잘못틀어 나를 사지로 몰아넣은 일이 있었다. 화장실 변기에 앉아 눈물을 짜내며 세상엔 나 혼자뿐이라는 자기연민에 빠져있다가 헤어나오는 데에는 약 3시간이 걸렸다. 가끔씩 발을 헛디뎌 컴컴한 어둠 속에 빠진 적은 원래부터 자주 있었지만 올해가 들어서는 처음이였다.

*
J에게 연락이 왔다.
우리는 10년 친구라기엔 조금 담백한 사이였는데, 서로에게 거의 무관심한 면에선 은근 잘 맞았다. 그것만 빼면 정반대였지만. 종강 후에 어학연수를 가니 그 전에 한번 보자는 단순한 메세지였다. 상상도 못했던 내용에 나는 살짝 충격을 받았지만 침착하게 약속을 잡았다. 영국으로 간다고. 그렇구나. 어렸을 때 J는 종종 영국에서 일을 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. 그때 나는 어떤 배신감 같은걸 느꼈었지. 우리는 만나면 늘 우리가 함께 살 집을 그려보곤 했었다. 커다란 집에 별을 볼 수 있는 유리 천장을 가진 다락방. 고양이는 몇 마리로 하는 게 좋을까? 같은 실없는 대화들.
가끔씩 J는 그것을 언급했었다. 그리고 1년 전부터 우리가 어렸을 때 적어온 노트들을 우리집에 가지고 와서 놓고 갔다. 나는 가끔 책장에 꽂혀있는 오래된 노트들을 보며 눈부셨던 시절에 대한 기억들을 되짚으며 시간을 보냈다. 그중에서 우리가 가장 공들여서 썼던 건 버킷리스트였다. 쭉 나열된 국가들 중 우리가 함께 발을 디딜 수 있는 곳이 정말로 있긴 할까. 네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 내가 먼저 제안할 일은 없을 거다. 그건 조심스러움이자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였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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